채식주의자를 읽는 내내 상의를 탈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에 등장하는 여자 영혜가 자주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느꼈다는 사실은 내가 영혜와 자주 연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책 안에 든 세 개의 연작소설 중 처음 탑재된 소설의 이름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3개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표현하기 쉽게 채식주의자를 1편, 몽고반점을 2편, 나무 불꽃을 3편이라 칭하고 싶다.
그렇게 부르겠다.
1편의 화자는 채식주의자인 영혜의 남편이다.
그 남편은 2편의 화자인 영혜의 형부와 동서지간이다.

나는 사실 동서, 매형, 매부 이런 명칭들에 썩 능통한 편이 아니라서, 처음엔 동서가 여자를 지칭하는 줄 알고 읽다가 계속 읽다 보니 동서가 의미하는 것이 위의 내용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준 것 같아 고마웠다.
영혜의 형부는 정신병동에서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혜를 데려다가 비디오 작품을 찍는다는 이유로 겁탈한다.
동의 하에 진행된 성관계 같기도 하지만 다시 심사숙고한다면 그것은 형부가 저지른 의도된 겁탈 쯤으로 부르는 것이 편할 것 같다.
3편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이다. 인혜는 자신의 여동생을 추행한 남편과 이혼하였으며 홀로 아들 지우를 키운다.
인혜는 불면을 심하게 앓고 있는데 나는 인혜도 영혜 못지 않게 정도 높은 정신병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혜는 과거의 나 같은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에 도달하자 사실은 영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 감각이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스포주의)
여기서부턴 오늘 막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나의 주관적인 감상을 스스럼 없이 펼쳐 보이겠다.
스포주의가 필요하다.
각 챕터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또는 장면을 기록해보려 한다.
우선 1편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영혜와 잠자리를 하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읽혔다.
무엇보다, 세 번에 한번은 삽입에 성공했다.라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혜의 남편이 강제로 영혜에게 달려들어 관계했던 것이다. 이것은 절대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니라고 나는 단정지어서 생각했는데, 이 생각에 이어 혹시, 내 생각이 틀린 것이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되었다. 다른 아내들은 다들 영혜 같이 사는 건가? 하는 의혹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의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지를 벗길 때 뜻밖의 흥분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게 세 번에 한번 삽입에 성공하고 나면 아내가 마치 자신이 종군위안부라도 되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올려다 본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묘사가 너무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쓴 작가의 의도를 잠시 의심했다. 아니 지금 영혜의 상황에 그런 단어를 붙여도 되나? 따지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선택이고 표현이니 존중하겠노라 하며 시선을 옮겼다. (한편으론, 일제시대가 끝난 현재에도 여전히, 종군위안부를 덮치던 일본군과 다를 바 없는 남성들이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2편은 예전에 읽었었다. 29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제목이 몽고반점이었고, 나는 왠지 몽골에 대한 어떤 낯선 이야기가 펼쳐지려나 하는 호기심 어린 마음에 책을 펼쳤었다. 그때쯤 한강 작가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굳혀진 것도 같다. 그녀의 겉모습과 그녀가 휘두루는 펜의 움직임은 상당히 괴리가 있다는 것. 그 차이가 그녀를 매력적으로 여기게 만든 게 아닐지 잠시 생각했다.
다시 읽은 몽고반점은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야구모자로 빠지기 시작한 머리털을 가리고, 늘어진 아랫배를 점퍼로 가린 중년의 남자가 아무도 없는 친구에게 빌린 작업실에, 정신과 약을 여전히 복용 죽인 처제를 데리고 와, 혼란스러운 예술 작품을 찍어나가는 광경이 이루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그 와중에 그 남자를 선배라 부르던 J라는 남자도, 하마터면 성추행에 노출될 뻔 했다. 나는 사실이 통쾌하면서도 서글펐다. 왜 통쾌한 걸까.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리하지 않은 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3편은 자신의 남편과 영혜가 몸을 섞는 과정을 목격한 이후 인혜의 삶. 영혜는 비가 오는 날 환우들과의 자유시간 무리에서 이탈해 혼자 실종되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발견되었다. 영혜는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 안에 뿌리박힌 죄책감의 공간, 축성 정신병원으로 걸어들어간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인혜는 영혜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영혜를 포기하는 동안 홀로 유일하게 영혜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영혜는, 인혜가 집어넣은 그 정신병원 안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다다른다. 나는 무엇보다도 인혜가 마지막에 차 안에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인혜는 이 말로 영혜를 달랬다.
꿈이라고 치부하는 밖에는 위안을 얻지 못하는 두 자매의 참혹한, 무너져가는 모습에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 '꿈'은 얼마나 안전한 장치였을까 생각했다. 자주 등장했던, 그녀들이 읊조리던 꿈 이야기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서 그 소설 속에 거주하고 있는 그 인물에게서 영혜와 인혜가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쪼록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나의 소중한 도서 목록 안에 가뿐히 안착하였다.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단지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다-라는 말로 끝을 내기에
찝찝함이 남는 글이어서
나는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이를테면 바람이 살금살금 부는 옥상에 의자 하나를 갖다 놓고서, 아님,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공기 안에서,
오늘 이 글을 쓴 나를 회상하며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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