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필사 7

강화길 작가 - 화이트 호스 - 작가의 말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쓴 뒤 이어 결정했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할 거야. 귀신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될 거야. 고택에 갇힌 이야기가 될 거고. 고딕 스릴러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역사는 집의 역사가 될 것이고,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기억이 될 거야. 그들의 기억에 따라 화이트 호스의 의미는 달라질 거야. 왜냐하면 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에 의해 그 의미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아. 이미 실패하고 있으니까. 결코 다다르지 못할 거고, 아마 나는 평생 고택 안을 헤매며 ..

소설필사 2025.03.06

지영(셋셋)

*43p (중략)뭐 대단한 사연이랄 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연극영화과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 수를 더하고, 십대에서 이십대까지 영화감독을 꿈꾸는 모든 지망생의 숫자를 더한 뒤, 실제로 영화계에 데뷔하는 한 줌의 사람들을 빼면 내가 기거하는 은하계가 완성된다. 누군가는 *44p매일 같이 좌절하고, 술을 마시다가 질질 짜고, 죽음을 생각하다가 실제로 죽어버리고, 나중에는 그래, 죽으면 그만이지 뭐,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그렇게 꺾이고 말라가며 한때 내가 꾸었던 꿈이 나를 산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간다는 게 내가 속한 성운의 보편적인 서사다. 그러니 우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자. 자기 연민은 아주 지루한 이야기니까. 사실 읽으면서 아니 서술어를 그렇게 하..

소설필사 2025.02.27

소년이 온다. 7~9p

*7p비가 올 것 같아.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너는 눈을 크게 떠본다. 좀 전에 가늘게 떴을 때보다 나무들의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언젠가 안경을 맞춰야 하려나. 네모난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작은형의 부루퉁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여름이면 콧 (이까지 썼을 때 한강작가의 변태적인 감각과 완벽주의, 이기려는 승부욕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도 이런 비슷한 느낌의 집..

소설필사 2025.02.26

조금 망한 사랑

페이지에 등장인물의 생각을 자연스레 흘려 넣는 기술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소설은 늘 첫 장을 쓸 때만 자유롭고 매끄럽다. 그런 혼란스럽고 각박한 나에게 단비를 부어줄 소설을 최근 목격했다. 심저에 깔려있던 메모지 한장을 집어들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에서 읽었던 단편 앞부분을 따라 써보는 게 어떻겠니. 그래서 지금 써보려 한다. *9p전화를 끊기 전 별 기대 없이 어디야?(별 기대 없이 라고 쓰니 왠지 더 기대하고서 물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 하고 물으니 고동이야. 지금 고동에 있어. 하고 대답했다. 고동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딘데, 하고 물으려는데 민재는 그럼 잘 지내, 말하고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작별인사를 했다.(잘 지내, 뒤에 '라고' 라고 쓸 법도 했지만 앞에서 이미 '하..

소설필사 2025.02.21

소설, 한국을 말하다

문화일보 박동미 기자가 쓴 기획의 말이 나는 괜히 좋다. 그가 내 블로그를 보게 될 리 만무하지만은 나는 마음에 든 그 글을 괜히 따라 써보고자 한다. 밑줄 친 부분을 읽을 때 소름 돋게 좋았다. 이유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라 홀로 간직하기로. *7쪽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2023년 가을부터 2024년 봄까지문화일보에 연재된 것들이다.'소설, 한국을 말하다'는 당시 시리즈 제목이었고 매주 새로운 작가가 4000자 안팍의 짧은 소설을 한 편씩 공개했다. 엽편, 콩트, 미니픽션 등의 이름이 있지만 연재를 진해하는 동안 나는 저 제목이 좋아서 '소설, 한국을 말하다'라고 늘 길게 불렀다. 보도가 아닌 '이야기'로 한국 사회와 문화, 그리고 한국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취지와 그 형식까지, 그보다 더 적확하게..

소설필사 2025.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