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필사

조금 망한 사랑

autonomy111 2025. 2. 21. 10:10


페이지에 등장인물의 생각을 자연스레 흘려 넣는 기술
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소설은 늘 첫 장을 쓸 때만 자유롭고 매끄럽다. 
그런 혼란스럽고 각박한 나에게 단비를 부어줄 소설을 최근 목격했다.
 
심저에 깔려있던 메모지 한장을 집어들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조금 망한 사랑>에서 읽었던 단편<포기> 앞부분을 따라 써보는 게 어떻겠니.
 
그래서 지금 써보려 한다. 
 
*9p
전화를 끊기 전 별 기대 없이 어디야?(별 기대 없이 라고 쓰니 왠지 더 기대하고서 물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 하고 물으니 고동이야. 지금 고동에 있어. 하고 대답했다. 고동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딘데, 하고 물으려는데 민재는 그럼 잘 지내, 말하고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작별인사를 했다.(잘 지내, 뒤에 '라고' 라고 쓸 법도 했지만 앞에서 이미 '하고' 라고 썼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게 나도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전원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민재야, 민재야, 불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휴대폰은 이미 주머니 속인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민재는 옆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했는데 단어의 낱낱은 모두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떤 힌트를 발견하고 싶은 사람처럼 멀게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을 때에야(이때 주인공이 좀 미저리 같고 찐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죄책감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
 
*10p
화를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미선씨 잠깐만,(랄랄의 보리씨 잠깐만 이 떠올랐다.) 하고 나를 부르는 팀장의 목소리에 나중으로 미뤘다. 그리고 오후 내내 팀장이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민재의 일을 잊고 있다가 퇴근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일층 버튼을 꾹 눌렀을 때에야 다시 떠올랐다.(지난 직장에서 늘 애용하던 엘리베이터를 상상했다. 작가는 어떤 엘리베이터를 상상하면서 썼을 지 문득 궁금했다.) 민재는 오랫동안 내 휴대폰의 단축번호 1번을 차지했고 그건 우리가 헤어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제하는지 방법을 까먹어서였는데, 찾아봐야지 했다가도 나중으로 미뤄버렸다.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 때문에 너는 될 일도 안 될거야. 그렇게 말한 사람이 민재였다.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다.(민재를 사랑하는 마음의 흔적과 그 흔적이 상기시키는 민재의 따가운 말, 하지만 그 말이 따갑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주인공이 민재를 얼마나 위하는지 알겠더라.) 다만 민재는 그 버릇으로 인해 내가 앞으로 계속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나중으로 미루지만 않으면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미룬 것들은 아주 사소한 일들로, 그 일들을 일찌감치 했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감당해야 하는 쪽은 평범한 삶보다는 특별한 삶이 아닌가.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고동은 아무래도 지명일 터였다. ('지명일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게 좀 더 안 오글거렸을 것 같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고동을 검색해보았지만 너무 많은 고동이 나와서 민재가 있다는 고동이 어딘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떤 고동도 서울 토박이인 민재와는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고동은 로드 뷰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산골 마을이었다. 
 
*11p
아마 충동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생 처음 들어보는 고동 같은 곳에 갔을 리 없었다 아니면 같이 간 사람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그런 생각들에 골똘하다가 내릴 곳을 지나칠 뻔했다.
호두는 외대앞역 출구 앞에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호두라는 별명은 호두가 늘 지압용 호두알 두 개를 가지고 다녀서 붙은 것이었는데, 마침 본명이 도영호여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호두는 만나자마자 민재 연락 받았냐?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단 뭘 좀 먹고 이야기 하자며 식당으로 호두를 끌고 갔다. ('이끌었다.' 라고 하면 어때?) 
"그래서, 민재 지금 어디래?"
자동으로 돌아가는 양꼬치 화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호두가 물었다. 나를 기다리느라 밖에서 오랫동안 겨울바람을 맞아서였는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요즘엔 다 자석으로 돌아가나봐. 옛날엔 꼬치를 홈에 맞춰줘야 했는데. 더 옛날엔 손으로 돌려줘야 했고."
"왜 딴소리야."
"다들 참 열심히 산다, 그지?"
"도대체 뭔 소리냐고."("도대체 뭔 소리야." 라고 하면 좋겠다.)
"고동에 있대."
"거기가 어딘데."
 
*12p
"나도 몰라."
호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냈다. 고동이 어디인지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처럼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민재가 있다는 고동이 어진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이런 데 다 전화해보자. 보니까 전부 시골 같은데 민재 같은 애가 나타났으면 동네 사람들도 알겠지."(민재같은 애가 어떤 애길래? 이준혁 같이 생겼나? 잘생긴 건가? 도시적으로 생겼나? 키가 큰가? 양복을 입고 다니나? 어떻게 생겼지? 하는 궁금증 폭발.)
호두는 고동 마을회관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내게 보여주었다. 
"일단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너 노트북 갖고 왔어?"
호두는 의욕적이었다. 
"이걸 다?"
"왜, 바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우리에게 시간은 많았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내일 못한 일은 모레 하면 된다. 월요일부터는 출근해야 하니까 기다렸다가 다시 또 주말에 하면 된다.(작가님 천재) 물론 주말마다 쉬지도 못하고 이 미친 짓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다른 일을 팽개치고 주말마다 민재만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호두의 손안에서 호두알 두 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려대는 호두는 작업을 끝내고 나면 손마디가 쑤시기 때문에 근육을 풀기 위해 호두알을 굴리는 거라고 했다.(이 호두알을 어떻게 활용하시려고 이러시나. 하는 궁금증.)
"일단 먹고, 나가서 카페에서 하자."
 
*13p
내 말에 호두는 호두알 굴리는 것을 멈추고 젓가락을 들었다. 튀긴 땅콩 한 알을 겨우 집었지만 입에 넣기 전에 놓치는 바람에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내 앞쪽으로 굴러온 땅콩을 질끈 밟았다. 신발을 떼자 납작한 땅콩이 보였다. (이것도 이 소설의 결론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 관계의 변형. 마치 점성이 있는 흰자와 노른자가 계란 후라이가 되는 과정. 단백질의 변성. 이 떠오른다.)
식당 안은 왁자지껄했다. 체온을 측정하고 방역 패스를 제시했으니 마음껏 굴어도 된다는 투였다. 아니, 그전에도 식당에서는 다들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먹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벗어야 하고 입을 크게 벌려야 하니까. 일행과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마음을 놓았다. 감염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운이 좋다거나 유달리 건강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점점 무감해졌다. 일평생 이렇게 어딘가 갈 때마다 체온을 측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새로 만난 누군가와 같이 음식을 먹을 만큼 친해지기 전까지는 상대의 하관을 보지 못한 채로 살아갈지 모른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게 뭐……라는 생각이 들만큼 현실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식당이 역에서 멀지 않아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뎅뎅뎅 울리는 경적이 잘 들렸다.
"나는 너무 태평해."
"애쓰고 있는 거야."
"너네 헤어진 건 맞지?"
나는 바보 같은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물끄러미 호두를 보았다.(아 대충 얘 성격 알겠다.) 호두도 시선을 느꼈는지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나 양꼬치 처음 먹어본다."
그 말에는 나도 대꾸할 말이 생각났다.
"뭐? 이십구 년을 살면서 양꼬치도 안 먹고 뭐했어."
"어릴 땐 몰랐지. 그땐 양꼬칫집이 많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대학 때는 그냥 싸구려 술집만 다녔고 취직해서는 돈 벌기 바빴고. 그리고 또……"
호두는 잠깐 말을 멈췄다. 나는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았다.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이즈음의 대화는 무엇으로 시작하든 민재에 대한 원망으로 끝났으니까.
"민재 때문이야. 민재가 내 걸 다 가지고 가버려서……"
"호두야……"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넌 아무 잘못 없어."(호두 성격도 잘 알겠음. 흥미진진.)
호두는 내가 할말을 잘 알겠다는 듯 미리 나를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억지 부리지 마. 민재 잘못이 아니야. 고작 양꼬치 하나에도 민재를 핑계삼지 마. 그게 다 민재 탓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호두가 민재를 알게 된 것은 나 때문이고 민재에게 이천만원을 빌려준 것도 민재보다는 나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말은 미안해, 일지도 몰랐다.(민재가 그렇게 잘생겼나? 하는 생각이 드..는 나는 속물일까..하는 생각.)  
 
[추가적인 감상 파편들]
 
*호두 등장씬이 너무 좋았다. 표현이 너무 매끄럽고 물 흐르듯 하였다. 
*부럽다. 얼마나 훈련하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이 분량을 이렇게 쓰고 나면 기분이 얼마나 충만할까?
*쓰면서도 정말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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