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너는 눈을 크게 떠본다. 좀 전에 가늘게 떴을 때보다 나무들의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언젠가 안경을 맞춰야 하려나. 네모난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작은형의 부루퉁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여름이면 콧
(이까지 썼을 때 한강작가의 변태적인 감각과 완벽주의, 이기려는 승부욕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도 이런 비슷한 느낌의 집착이나 강박의 기운같은 것을 느꼈다.)
*8p
잔등을 타고 자꾸 안경이 흘러내린다고, 겨울엔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작은형이 그랬는데, 더이상 눈이 안 나빠져서 안경을 안 쓸 순 없을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당장 집에 들어와.
단단히 화가 나 있던 작은형의 목소리를 털어내버리려고 너는 고개를 흔든다. 마이크를 쥔 젊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분수대 앞 스피커에서 울려온다. 네가 걸터앉은 상무관 출입계단에서는 분수대가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나마 추도식을 보려면 건물 오른편으로 돌아나가야 한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너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까지 썼을 때 왜 젊은 남자가 아니라 젊은 여자를 선택했을까. 왜 나는 젊은 여자라는 것에 반응을 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출입계단은 출입계단이기 이전에 계단일텐데 그것을 출입계단이라고 묘사한 이유가 있을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단순한 이유에서, 너가 저기에 걸터 앉아있다가 들어갈 수도 있고 나갈 수도 있고 할 수 있어서, 그런 가능성 이란 게 존재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쓰고 나니까, 작은형이 안경을 썼을 때 실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한 것이, 실내가 꼭 본질을 뜻하는 것 같고, 너는 그 본질과 비본질의 중간 지점에 걸터앉은 인물인 것 같다, 그 중간지점에서 독자에 해당하는 우리들은 무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란 것을 작가가 나직하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러분, 적십자병원에 안치되었던,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자의 선창으로 애국가가 시작된다. 수천사람의 목소리가 수천미터의 탑처럼 겹겹이 쌓아올려져 여자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
(이 문장들에서, 한강작가가 소리를 시각화한 것에 대해 좀 감동을 받았다.)
무겁디무겁게 올라가다가 절정에서 결연히 쓸려내려오는 그 곡조를, 너도 낮은 목소리로 따라 부른다.
오늘 적십자병원에서 오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네가 아침에 물었을 때 진수 형은 짧게 대답했다. 한 서른명 될 거다. 저 무거운 노래의 후렴이 다시 까마득한 탑처럼 쌓아올려졌다가 쓸려내려오는 동안, 서른개의 관들이 차례로 트력에서 내려질 것이다.
(여기서 내려질 것이다 라는 수동 형태의 문장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나는 이 앞장을 한 대여섯번 가까이 반복해서 읽었는데, 일종의 예열 작업인데,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매번, 이 내려질 것이라라는 수동적인 표현이 눈에 띄었다. 관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되면 이제 더이상 능동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각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구나, 하면서.)
아침에 네가 형들과 함께 상무관에서 분수대 앞까지 날라놓은 스물여덟개의 관들 옆에 나란히 놓일 것이다.
*9p
상무관에 있는 여든세개의 관들 중 아직 합동추도식을 치르지 않은 것은 모두 스물여섯이었는데, 어제저녁 두 가족이 나타나 시신을 확인하고 급히 입관을 해 스물여덟이 되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남들이 보면 단지 26이란 숫자가 28이란 숫자로 바뀌는 것일 뿐일테지만, 사실은 그 사이에 많은 사연들이 있고 울음이 있고 웃음이 있고 희열이 있고 내려놓음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2014년 당시 기자 신분이었는데. 그때의 충격, 뉴스 화면 오른편 윗쪽에 왔다 갔다하며 바뀌던 숫자를 보고 하던 생각을 떠올렸다.)
너는 장부에다 그들의 이름과 관 번호를 덧붙여 쓴 뒤, 긴 괄호로 목록을 묶고 '합동추도식3'이라고 적었다. 다음 추도식을 할 때 같은 관이 또 나가지 않으려면 잘 기록해둬야 한다고 진수 형이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걸 읽으면서 나는 또, 그래 3이란 숫자가 적절했겠네. 이제 처음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까지 낯선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2도 아니고 3이니까. 3에서 오는 그런 익숙함과 아직은 익숙하지 않음, 그런 것들이 섞여있는 상태였겠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만은 너도 추도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는 너에게 상무관에 남으라고 했다.
그사이에 누가 찾아올지 모르잖아. 잘 지키고 있어.
함께 일하던 형들과 누나들은 모두 추도식에 갔다. 여러 밤을 관앞에서 새운 유족들은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꽂고, 몸속에 모래나 헝겊을 채운 허재비들처럼 느릿느릿 관을 따라 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은숙 누나는 네가 괜찮다고, 어서 가보라고 말하자 덧니를 살짝 보이며 웃었다. 그 덧니 때문에, 어색하거나 미안해서 억지로 웃을 때도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장난스러워 보였다.
그럼, 시작만 보고 금방 올게.
(으니숙 누나는 왠지 ENFJ일것 같다.)
혼자 남은 너는 상무관 출입계단에 걸터앉았다. 검은색 마분지로 앞뒤 표지를 댄 장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 아래로 느껴지는 시멘트 계단이 차가웠다. 체육복 위에 걸친 교련복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단단히 팔짱을 껶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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